박승만

김얼터 (2024. 5)


사진 이후의 사진

 ― 박승만의 엔젤릭버스터

윤율리 (2024. 5)




현실과 그 너머 세계의

경계면에 위치한 사물들

이승훈 (2017. 8)

현실과 그 너머 세계의 경계면에 위치한 사물들

이승훈, 미술평론가



박승만 작가의 사진 작업은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의 이면에 있음직한 어떤 다른 시각, 혹은 어떤 다른 사유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만든다. 이러한 경향의 작업은 작가에 의하면 그의 조부께서 돌아가신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그 사건 이후 그는 인간과 사물 그리고 공간이 서로 공존해왔던 일상적 관계가 다르게 느껴졌고, 더 이상 그 사건 이전과 같아 보이지 않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조부의 부재 상태는 사용하였던 사물과 공간마저 다른 시각으로 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작업에서 특정한 사물들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상황을 만들어 촬영한 것은 어떤 실제적 사실을 담아낸 것이 아니라 작가의 내적 정서로부터 발생되는 심리적 시각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사진 매체로 담아내고자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사물들을 보면 그 대상들에게만 일상의 자연을 지배하고 있는 중력의 법칙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 듯 화면의 한 가운데에 솟아 올라와 있다. 관객들은 이 화면에서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 사물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마치 초현실주의 회화에서의 데페이즈망 기법을 보는 듯이 시각적 혼란에 잠시 빠져들게 만드는 묘미가 있다. 화면의 모든 사물들이 중력 방향을 향하고 있지만 오직 가운데 있는 한 대상은 그 힘을 벗어나게 된 상황을 보게 되면 아마도 관객은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화면 속 사물들은 일상에서의 관조적 대상에서 의미론적 대상으로 변경되어 버리고 만다. 결국 그의 작업 방식은 관객에게 사물들간의 관계를 다시 읽어보고 사유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업들을 살펴보면 작가와 그의 조부 그리고 조부께서 생전 사용하셨던 사물들의 관계가 서로 강하게 이어져 있었음을 확인시켜 준다. 작가에게 있어서 조부의 유품들은 조부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인해 이미 일상적 사물 위치에서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의 영혼이 중력에 구속되지 않듯 유품으로 남겨진 사물들도 허공에 떠 있게 된 것을 보게 된다. 이는 일반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더 특별한 시각 경험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 같다. 작가는 남겨진 유품에서 죽음의 경계 너머를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현실 세계를 담아내는 도구인 사진이라는 매체를 다루고 있음에도 이를 통해 현실의 경계 너머를 담아내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피사체에 현실 속 사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음에도 인간의 생명과 죽음의 경계 너머를 담고자 하는 그의 이번 작업 태도와도 연결되고 있다. 


인간의 시각은 항상 가시적인 세계 안에 가둬져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박승만 작가는 작업에서 그 시각의 경계와 범위를 확장해내고자 한다. 조부와의 특별히 친밀했던 관계로 인해 작가에게 조부의 부재 공간은 더욱 공허한 느낌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남겨진 유품들은 현실 속에 남겨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부와의 관계로부터의 시각에 지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현실 속에 있는 유품들이지만 적어도 작가에게 있어서는 이미 현실의 사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작가는 이 장면을 사진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사진 작업에는 현실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부재한 것일 수 밖에 없는 특별한 관계 속에 있는 사물들의 경계적 위치가 포착되어 있는 것이다. 박승만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현실 이면의 세계까지 엿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사물의 가시적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그 경계 지점에 주목하고 있는 작가의 시각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그 독특한 시각에 주목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