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은 (양쪽으로) 열린 문

Photograph is an (double)Opened Door

김여명 (2024. 5)


사진 이후의 사진

 ― 박승만의 엔젤릭버스터

윤율리 (2024. 5)




현실과 그 너머 세계의

경계면에 위치한 사물들

이승훈 (2017. 8)


It is not a CGI:

looking through the lenses of Seungmann Park

Tuce Erel (2024. 1.27)


사진은 (양쪽으로) 열린 문 (Photograph is an (double) Opened Door)

김여명


박승만 개인전 《엔젤릭 버스터》(스페이스 카다로그, 2023)의 사진들은 가상과 현실 사이 위상을 바꿔 보려는 시도이다. 전시의 서문은 이와 같은 시도를 “게임의 이미지 파일을 코스프레하는 사진”이라고 쓰고 있다. 코스프레는 ‘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의 일본식 준말로, 통상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영화에 등장하는 의복과 장신구, 무기 등을 실제로 제작하여 해당 캐릭터를 현실에서 연기하는 놀이를 가리킨다. 1980년대 초 일본에서 처음 등장한 이 놀이는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대 중후반에 걸쳐 10대 문화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으며, 최근에는 코스프레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도 등장하고 있을 만큼 전문적인 영역이 되었다. 코스어들은 단순히 캐릭터의 외형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캐릭터의 성격, 포즈, 자주 사용하는 몸짓을 연구하여 캐릭터 자체가 되고자 한다. 아니, 바꾸어 말하면, 그들은 캐릭터를 가상에서 현실로 끌어낸다.


내용에서든 형식에서든 코스프레와 같이 가상과 현실 사이를 오고가는 요소들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일견 가상과 현실 사이 메울 수 없는 간극을 다루려는 것처럼 보인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사진들은 게임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현실로 끌어내리고 그것을 다시 사진의 가상 안에 밀어넣는다는 과정을 경유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가상과 현실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작업에 으레 따라붙는 문제들은 코스프레의 완성도 판단을 위한 기준과 거의 다를 바 없다. ‘이 코스어는 얼마나 해당 캐릭터 같은가’라는 말은 곧 ‘이 가상은 얼마나 현실과 닮아 있는가’, ‘얼마나 가상을 잘 따라 했는가’ 같은 말로 대치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박승만의 사진은, 그리고 그가 굳이 가상을 현실로 끌어내린 피사체를 다시 가상 안에 밀어넣는 길고도 번거로운 과정을 거쳐 사진을 매체로 작업하는 것은 작업이 겨냥하는 바가 재현 완성도인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러므로 지난 개인전 《점사》(온수공간, 2022)에서 《엔젤릭 버스터》로 이어지는 박승만의 사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이미지가 가상을 얼마나 잘 묘사하고 재현하고 있는지의 여부가 아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열화된 이미지에서 감각되는 기묘한 진실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열화된 이미지는 코스프레와는 다른 척도를 사용한다. 예컨대 일반적 사진과 코스프레 같은 경우 해상도가 높아질수록, 더 작은 부분까지 묘사되어 있을수록 그것은 현실 혹은 진실을 담보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너무 좋은 화질에서 비롯되는 명확함과 세밀함은 그것이 조작됐거나 의도됐거나 아무튼 사실이 아니라는 인상을 준다. CCTV나 우연히 찍힌 사진의 흔들림이나 불명확함을 생각해 보자. 이 이미지들은 그것이 선명하지 않다는 이유로 더욱 현실인 것으로 고려된다. 어떤 측면에서, 박승만은 이 두 번째 기준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지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림 1) 〈10m 앞 엔젤릭버스터〉(2023)


(그림 2)  〈멀어지는 엔버(10m부터 200m 앞)〉(2023) 중 일부 (가장 저화질인 것으로 셀렉해 주세요)


예컨대 전시의 방향을 안내하는 첫 번째 사진 〈10m 앞 엔젤릭버스터〉(2023)와 그 옆의 벽과 코너를 따라 작은 크기로 길게 늘어져서 걸린 〈멀어지는 엔버(10m부터 200m 앞)〉(2023)은 유명 노가다 게임 메이플 스토리의 직업 ‘엔젤릭버스터’를 코스프레한 코스어를 촬영한 작업이다. 〈멀어지는 엔버(10m부터 200m 앞)〉은 그 제목에서부터 피사체와 카메라 사이의 다양한 거리를 언급하고 있다. 그 언급에 더불어 모공 하나까지 다 보일듯한 이미지에서 깨진 픽셀로 구성된 이미지로 점차 흐르는 이 사진을 보는 관객은 아마 조작 가능성에 대해, 그러니까 작가가 정말로 피사체로부터 10m, 20m, 50m, 100m, 200m를 물리적으로 멀어지며 촬영한 결과인지, 아니면 포토샵에서 임의의 처리를 통해 이 같은 결과를 낸 것인지 추궁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현실과 가상 사이를 판가름하는 두 가지 기준이 이 작업들에 얽혀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로 사진의 내용적 측면에서, 코스프레하는 자와 엔젤릭버스터 사이 유사성을 기준으로 하는 질문은 먼저 언급한 기준과 맞닿는다. 조금 더 캐릭터 같을수록 완성도 있는 코스프레로 평가 받는다(

작가가 다른 많은 캐릭터 중에서도 엔젤릭버스터를 선택한 이유는 이 직업이 게임 플레이를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P2E(Play to Earn)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기 때문이며 이 또한 가상과 현실 사이에 명확한 경계를 일깨운다). 그러나 이 사진이 만들어진 과정의 측면과 결론적으로 만들어진 사진의 형식적 측면에서, 박승만은 현실과 가상 사이의 유사성을 넘어 무엇이 조작된 것처럼 보이고 무엇이 현실로 보이는지 판가름하는 기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회화나 조각을 보는 관객과 사진이나 영상 매체를 보는 관객 사이에서 이미지가 가상인지 현실인지 구별하려는 노력을 비교해 보면, 후자에서 유독 가짜를 판독해내려는 기준이 두드러짐을 알 수 있다. 사진을 위시한 기계적 매체를 사용하는 작업에게는 늘상 조작 가능성, 가상성, 진실성, 사실성, 현실성 같은 기준들이 따라 붙는다. 왜 특히 어떤 매체를 향한 추궁과 심판이 더욱 가혹할까? 


박승만의 사진은 그러한 추궁과 심판에 대답하지 않는다. 명석판명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대답을 내어 주기도 어려울 뿐더러, 거기에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의 피사체들에는 마감되지 않은 테이프나 사진마다 다른 자리에 위치한 머리카락처럼 언제나 ‘이것은 가상이 아니다’를 선언하는 표지들이 숨어 있고, 따라서 관객은 사진을 하나의 전체 이미지로 파악하기보다 세부를 샅샅이 살피게 된다. 관객은 이것이 가상이 아님을 가리키는 표지를 보고 상황이 가상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 이미지의 조작 가능성은, 작업이 사진인 한 끝까지 소거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현실로 끌어내린 다음 다시 프레임 안 가상으로 밀어넣는 복잡한 과정이 유도하는 것은 바로 이 추궁과 심판을 의식하게 만드는 데에 있다. 이는 판단 유보와 다르다. 박승만의 사진이 유도하는 것은 판단을 잠시 멈추라는 권유가 아니라, 판단의 자리를 떠나거나 다른 구조를 형성하는 데에 있다.


(그림 3) 박승만 개인전 《점사》(2022) 작품 중 〈M327〉(2022)의 일부. (테이프 뜯긴 부분)


〈조단링〉(2023), 〈50m 앞 코어젬스톤〉(2023), 〈천사의 목걸이〉(2023), 〈조단링 2〉(2023), 〈팔라딘의 인벤토리〉(2023)  같은 작업들도 마찬가지 선상에서 관객의 판단을 끌어내도록 기능한다. 이 사진들은 게임 속 아이템을 현실에서 구현하고 이를 다시 사진으로 촬영해 다시 이미지라는 가상에 돌려 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들은 이미지를 인쇄한 것이라는 점에서 현실이고, 그렇지만 그것은 다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꾸며낸 것이라는 점에서 가상이고, 그렇지만 어쨌든 잠깐이라도 코스어의 몸을 매개했으니 그것은 다시 현실이고……. 이 순환 논증 자체가 박승만의 사진이 구현하는 가상과 현실의 겹침 혹은 양쪽으로 열린 구조이다.


현실과 가상 사이가 각각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존 구조로 생각되는 한, 우리는 현실과 가상 사이가 파열됐거나 될 것이라는 결론 외에 다른 결론에 이를 수 없다. 완전히 가상인 이미지와 현실의 이미지를 점점 더 구분하기가 어려워진다는 것, 그러므로 가상이 현실보다 더 현실 같다는 것, 현실이 가상보다 더 가상 같다는 것, 아니면 가상이 언젠가는 현실을 삼키고 유일한 실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이미 충분히 그렇게 됐을지도 모르겠다는 것 등등, 이외에도 얼마든지 두렵고 무시무시한 결론들을 도출해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결론들이 무시무시하다는 것 외에 어떤 미학적 효용을 가지는지는 모호하다. 


이번 전시 작업 중 다른 작업들로부터 독특해 보이는 〈사냥, 채굴, 노동의 이펙트〉(2023)는 박승만의 작업이 제시하는 구조를 가시화한 결과다. 이 작업 안에서 게임의 스킬 이펙트와 필름의 촬영 효과는 서로 구별될 수 없을 정도로 엉켜 있다. 현실과 가상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간극 같은 건 없으며, 그러므로 파열도 없다. 그것들은 단지, 한 프레임 안에서 서로에게 열려 있다. 엔젤릭버스터는 메이플 스토리 게임 세계관 안에서 ‘해적’으로 분류되지만, 사실은 ‘마법사’에 가깝다고 한다. 아이돌 콘셉트의 전사라는 이 기묘함조차도 《엔젤릭버스터》에 재미를 더한다.